“꿈꾸는 자와 탐욕자 (5)”
- daeyeoul
- 2019년 10월 4일
- 1분 분량
고대 애급사회에서 왕은 인간 가운데 거하는 신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왕이 우주의 신들과 인간의 중재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딤전 6:4)
바로의 태도는 세상의 모든 원리를 자기를 중심으로 판단하며 자기의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배격하는 행위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성경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이 신이 되어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부하는 전공분야 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기 자신이 신이 되어 하나님 없이 자기가 삶의 주인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로와의 격돌을 다루고 있는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 이야기는 실제로 두 신(神)간의 대결이 중심 사상입니다. 즉 히브리 노예의 하나님인 야웨와 애굽인의 신이라 할 수 있는 바로와의 대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출애굽기 5장 1절은 중요한 선언입니다. “내 백성을 가게 하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기리라!” 다시 말해, “애굽의 신인 너, 바로를 섬기는 데서 떠나게 하라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나를 섬기리라!”
이 구절이 뜻하는 바는 단순히 출애굽 사건이 사회적 착취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전부라면 해방신학은 정당한 신학적 목소리일 것입니다. 한때 중남미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해방신학의 출발점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구는 정치적 사회적 해방만을 말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이 문구는 매우 종교적입니다. 즉 “누구를 섬길 것인가?”하는 문제가 열가지 재앙 이야기의 밑바탕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누구를 섬길 것인가?"하는 문제는 인류가 태고로부터 지금까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본질적 질문입니다.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야웨 하나님을 섬기느냐 아니면 다른 세력들 (신격화된 각종 피조물들) 을 섬기느냐에 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은 바로의 당돌하고도 오만한 질문 (5:2절 “야웨가 도대체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말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보낸단 말인가! 나는 야웨를 알지 못한다!) 에 대한 행동된 ’대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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