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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열 목사

”종말론적 현실이해“


어제 새벽에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왼쪽 엉덩이 위쪽 근육에 통증이 너무 아파서 오늘까지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그동안 운동을 하는데 몸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였는데 이틀 동안 허리 굽은 노인들이 걷듯이 하여야 통증을 견딜 수 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의 몸에 이상이 올 줄 몰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난주 설교예화에 나온 어리석은 부자가 떠오른다. 자기의 미래를 위하여 주도면밀하게 재산을 모으고 준비하였지만 한 순간에 종말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부자의 이야기다. 이 예화를 들을 때 청중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설교자인 나조차도 인생의 종말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하게 공감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머리로는 끄덕일지 모르지만 다시 일상의 문제에 얽매이며 내일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갑작스런 고통으로 괴로워할 때 나는 비로소 어리석은 부자의 운명이 바로 나에게도 동일하게 찾아올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주님께서 탐욕에 사로잡혀 있는 군중들에게 탐심을 삼가고 물리치라는 경고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물론 나에게는 미래를 위하여 쌓아놓을 재물은 없다. 하지만 될 수 있는 한 인생의 종말에 관하여는 잊어버리고 현재에 충실하려고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현재의 시간에 충실하고 그 시간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그 현재의 행복도 인생의 종말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일상 속에서 깊이 인식하고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일상 속에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육신의 고통은 인생의 종말을 생각하게 만들고 비로서 주님의 말씀이 나의 오감과 영혼에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이렇게 보면 성경의 가르침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가르치고 있다. 인류의 역사의 종말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종말의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성경의 가르침은 더욱 현실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소망의 메시지로 다가오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가 오히려 복이 있다고 하신다. 가난하고 애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듣게 되는 주님의 말씀은 더욱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종말의 소망으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종말론적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부자와 건강한 자 보다 가난하고 병든 자가 더욱 복되게 보인다. 왜냐하면 부족함이 없고 고통이 없는 인생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당신의 종말을 깊이 인식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였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는 두려워하며, 괴로워하셨다. (33)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34)

“ (막 14: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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